그레이엄 스테인스와 두 아들 – 1999년 1월

그레이엄 스테인스와 두 아들

1999년 1월

그레이엄 스테인스 가족

호주 퀸즐랜드(Queensland)주에서 성장한 그레이엄 스테인스(Graham Staines) 인도 오디샤(Odisha, 전에는 오리사라고 )주에 있는 한센병 병원에서 의술을 배웠다.  그레이엄은  병원에서 환자를 보살폈을  아니라 힌두교 지배적인 지역에서 복음 전도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가  자녀를 데리고 아내 글래디스(Gladys) 함께 사는 지역도  힌두교 지역이었다.  

1999 1, 그레이엄은 5 동안 복음전도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홉  디모데(Timothy) 일곱  빌립(Philip) 아빠와 함께했다. 어느  , 그레이엄과  아들이 일과를 마치고 차에서 자고 있을  극단적인 힌두교도들이 차에 불을 지르며 그들을 공격했다. 폭도들에 의해 자동차 안에 갇힌 그레이엄 선교사는  아들을  안고 숨을 거두었다.  폭도들은 선교사 가족을 구하려던 사람들 협박했고 심지어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경고했다.  

인도 대통령은 그레이엄 선교사와  아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이들을 규탄했다. 살해 사건이 일어나고 이틀 , ‘복음주의 선교사 협회(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에서 운영하는 병원의 한센병 환자들이  명의 희생자를 묻어주었다. 그레이엄 선교사의 아내 글래디스 사모  에스더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으로 조문객들을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찬송을 불렀다.   

예수님같이 낮은 곳에 임하신 친구 없네 

그런 분 없네 아무도 없네 

우리 모든 영혼을 치유할 분 주 밖에 없네 

주 밖에 없네 아무도 없네 

주님 나를 떠난 적 한 번도 없네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으로 나는 안식 얻네 

주 밖에 없네 주밖에 없네 

나중에 글래디스 사모 친구들과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살해되기 열흘 , 기도하는데 제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잠시 묵상한 뒤에 눈물을 쏟으며 저는 이렇게 답했어요.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게 있는 것을  가져가세요.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칩니다.”  

남편을 잃은 뒤에  글래디스 사모 인도에 남아 한센병 병원 일을 거들었다. 원에서 5년을  도운 , 그녀는 딸의 공부를 위해 호주로 돌아갔다. 2005, 글래디스 사모는 인도 정부 주는 민상을 받았다.  일로 힌두교 민족주의 단체들이 항의하기도 했다. 복음주의 선교사 협회  한센 원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 그레이엄과  아들이 순교하고 거의 4 만에, 인도 법원은 그레이엄과  아들을 공격했던 극단적인 힌두교 지도자와 다른 12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극단적인 힌두교도들이 불태운 자동차. 안에서는 그레이엄과 두 아들이 갇혀 있었다.

박해의 이면에 있는 것

1999년에 그레이엄 스테인스 선교사와 그의 두 아들(디모데와 빌립)이 살해된 사건은 ‘바즈랑 달(Bajrang Dal)’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힌두교 집단 소행이었다. 호주에서 온 그 선교사가 두 아들과 함께 자동차 안에서 불에 타 죽었을 때, 범행을 저지른 무리들은 ‘자이 바즈랑 달!(Jai Bajrang Dal)’이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바즈랑 달에게 승리를!’이라는 뜻이었다.

‘바즈랑 달’은 ‘비슈바 힌두 파리샤드(Vishva Hindu Parishad, 세계 힌두교 협회)’의 청년단체이고, ‘비슈바 힌두 파리샤드’는 우익 준군사 조직인 ‘민족 봉사단(Rashtriya Swayamsevak Sangh)’에 속한 단체이다. 민족 봉사단은 인도 전역에서 힌두주의 사상을 옹호하면서 순수 힌두교 국가 건설을 주장한다. 초기의 힌두주의 주창자 가운데 한 명인 비어 사바르카(Veer Savarkar)는 1923년에 “한 나라, 한 신(神), 한 계급, 한 마음, 의심도 차이도 없이 모두가 한 형제”라는 민족주의 표어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의 민족 봉사단 지도자 모한 바그와트(Mohan Bhagwat)는 ‘다양성 안에 있는 통일성’을 장려하는 것이 힌두주의의 특징이라고 밝혔지만, 인도에 사는 사람 모두 힌두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는 2018년 뉴델리에서 열린 공개 행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힌두교도라고 부르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하나의 민족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힌두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힌두교도라는 사실을 망각했거나 망각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 다 우리 민족입니다. 우리 모두는 힌두교 공동체입니다.”

민족 봉사단 초기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골워커(Golwalkar)는 인종 정화 운동을 펼친 나치 독일을 칭송했고, 인도와 힌두교는 동의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도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 기독교를 퍼뜨리기 위한 세계적인 운동의 주체로 인식하고 자기를 낳아준 조국에 먼저 충성하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와 유산의 진정한 자녀로 살기를 거절한다면, 이 땅에서 적대 세력으로 남을 것이며 그렇게 취급당할 것입니다.”

민족 봉사단은 1925년에 설립된 이후,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러, 반복적으로 활동 금지 명령을 받았다. 민족 봉사단은 1948년 단원 한 명이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를 암살했을 때 활동 금지 명령을 받았었고, 1970년대에 들어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정부 아래서도 활동 금지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1980년 ‘인도 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이라는 정당을 창설했고, ‘인도 인민당’은 1990년대까지 인도 정부 내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쳤다.

2014년, 민족 봉사단의 장기 단원(8세 때부터 단원이었음)이자 인도 인민당 당원이었던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가 인도 수상에 선출되었고, 2019년에는 압도적인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정부가 종교적 차별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하지만, 그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그가 수상에 당선된 후에 민족 봉사단 회원이 20% 늘어났고, 거의 모든 마을에 밀고자들이 있어서 기독교인과 비 힌두교 주민의 동향을 꼬박꼬박 상부에 보고한다.

힌두교도가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사건은 인도 역사 전반에서 일어났었지만, 최근 힌두교 민족주의가 성장하면서 많은 힌두교도가 폭력을 합법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오늘날 누구든지 힌두교가 아닌 종교를 따르면, 특히 힌두교를 믿는 사람을 다른 종교로 인도하면 박해의 표적이 된다. 이런 경우, 폭력을 자행한 힌두교도가 아무 형벌도 받지 않는 일이 다반사이다. 모디 총리 정부는 비 힌두교도에게 폭력을 자행하여 고발된 ‘바즈랑 달’ 단원을 석방해주었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SNS로 선교사들의 동향을 보고한다. 민족 봉사단 단원들은 인도의 기독교인들이 강제로 힌두교로 돌아오게하기 위해 가르 왑시(Ghar Wapse, ‘귀향’이라는 의미임)라고 하는 ‘복귀’ 의식을 계속한다.

인도의 기독교인들은 조국을 사랑하지만, 자신들을 죄에서 뿐 아니라 암흑 같은 힌두교에서도 건져주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더 충성한다. 그리고 그들은 힌두교가 아니라 자신들이 섬기는 한 분이신 참 하나님께 속한 인도 땅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소망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건다.

‘순수한’ 힌두교 민족을 이루기 위해 목회자와 가정교회를 공격하는 힌두교 민족주의 청년 단체 바즈랑 달 (사진제공: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