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특집】 제7부.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
김교신의 삶과 죽음을 다시 살펴보면 그를 단순히 한국 교회에 반대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로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깨닫게 된다. 사실 김교신의 사명은 조선 교회에 반대하는 것과는 거의 무관했으며, 오히려 참된 한국 기독교를 만드는 일에 모든 열정을 쏟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 신앙을 갖게 된 곳은 조선에 있는 교회도 조선 땅도 아니었다(황, 2012, 85).
그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전제 없이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 했던, 조선에 온 선교사로 보는 것이 옳다. 그는 조선이라는 한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가장 조선다운 형태의 참 기독교를 개발하는 것이 급선무라 믿었다. 김교신과 그의 지지자 및 반대자들도 동의하는 부분은 바로 그가 교회가 아닌, 조선과 그리스도를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부흥사 길선주 목사의 제자였던 저명한 장로교회 김인서 목사(1894-1964)는…[김교신을 비판하였고] … 김교신이 조선(Choseon, 한국), 그리스도(Christ), 그리고 교회(Church)를 사랑했다고 거짓 공언했다. 그의 말과 달리 김교신이 사랑한 것은 두 가지 C, 즉 그리스도(Christ)와 조선(Choseon)이었다(황, 2012, 111).”
김교신은 월간 《성서조선》 75호 편집자 기고란에 스스로 “성서와 조선; 조선에 성서를; 성서에 기초한 조선”이라고 적기도 했다(김 인용, 2012, 192). 결국, 조선의 교회들은 그의 성품이나 사역의 열매를 보지 않고, 단순히 그가 기독교인에 대해 정의한 것에 근거해 그를 적대시했다.
칼빈에게 있어 참된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히 선포되고 들리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가 집례하셨던 것을 따라 성례전(세례와 성찬)을 올바르게 베푸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참된 교회는 복음이 올바로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행해지는 곳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세기 초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교회에 대해 유사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반면 무교회주의는 설교도 하지 않았고 성례전도 집행하지 않았다(황, 2012, 113).
김교신이 볼 때는, 서양의 종교의식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 보다 조선 기독교인이 직면해 있던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는 조선의 교회들이 그가 “매우 강한 괴물”이라고 부른 교파 주의를 넘어서기를 촉구했다.
오늘날 매우 강한 괴물이 기독교인들 앞에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교회 안팎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하는 세대와 마주하고 있다. 이 세대에 만연해 있는 현 흐름은 참 종교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순교자의 피를 흘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한 세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교회 안에서 얻는지 아니면 교회 밖에서 얻는지에 대한 논쟁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는 자들을 위해 무덤을 준비할 것이다. 혹 우리의 시신을 본다면 우리를 묻어주시오(《성서조선》100호부터, 김인용, 2012, 193).
김교신의 마음이 이러한 더 큰 임무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조선 교회가 결국 그와 그의 가르침을 거부한 사실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훗날 서울시립대 자연과학 교수가 된 김교신의 제자 구군(Guhn Goo)이 훗날 교회와 그의 전 삶의 문제를 다루며 회상한 대로, 김교신은 “담대히 해야할 옳은 일을 하는 자유”를 누렸던 분이다.
의민태자와 의민황태자비 이 씨는 태자의 어머니 현황귀비 엄씨가 세운 양정 학교를 방문했다. 해당 지역 및 학교 전체가 깨끗이 청소되었고 교사들은 연미복을 입었으며, 학생들의 작품이 두 교실에 전시되었다. 500명의 학생은 깨끗한 옷을 입고 길 양쪽에 두 줄로 서 있었다. 한 시간을 기다린 뒤 마침내 의민태자의 자동차 행렬이 그곳에 도착했다. 의식의 마지막 순서였던 시찰은 엄숙히 마무리되었다.
그 순간,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학교 본관에서 교문 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길을 내려와 날아가는 화살처럼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갔다. 바로 김교신 선생이었다.
학교 전체가 명절 분위기였는데, 김교신 선생은 아무 염려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남의 의견에 대해 완전히 의연한 모습이었고 담대하게 옳은 일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김, 2012, 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