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교신 특집 소론】 제5부. 10년 먼저 군자(君子)가 되는 법
10년 먼저 군자(君子)가 되는 법
【김교신은 누구인가?】
김교신 선생은 오늘날 한국과 전 세계가 귀 기울여야 할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 한 사람으로, 이 글은 폴리현숙 박사(한국 순교자의 소리 회장)가 그에 관해 쓴 특집 소론(小論)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서양 기독교를 ‘부패하고 부도덕한 기독교’로 여겼다. 교파적 경쟁에 사로잡혀 있으며 서양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이것이 비(非)서구권 사람들에게 적합하지 않다며 거부했다. 그의 견해로 보자면, 서구 교회들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각 교단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했다(황, 2012, 22).
우치무라 간조가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은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닐 때였다. 미국의 ‘세속적인 문화’와 ‘기독교적 도덕 규범의 결여’를 경험한 후, 우치무라는 과연 미국 기독교인들이 일본인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치기 적합한지 의심하게 되었다(황, 2012, 72).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보다 자신의 교회와 교단을 확장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황, 2012, 23). 일본으로 돌아오자 그는 일본 교회가 이미 이러한 당파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식 적용이 아닌 본래의 믿음에 충실한, 진정 일본식인 기독교를 만들어 내기로 결심했다(황, 2012, 23).
우치무라 간조는 기숙사 어느 방에서 친구들과 모임을 시작하면서, 이를 일종의 ‘무교회(無敎會)’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담은 잡지를 창간 (1900년부터 1930년까지 출판)했고, 매주 직접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연구회도 만들었다(황 2012, 23). 이들은 모였을 때, 서구 교회식으로 예배를 따라 하지 않았다. 대신 학문을 닦는 유교적 형식을 따랐는데, 우치무라 간조는 이편이 일본 문화에 더 적합하다고 믿었다.
그들의 모임은 완벽히 민주적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모였고, 그 모임에는 어떠한 형식적인 의식도 없었으며, 모두 교대로 모임을 인도했다. 각 사람이 돌아가며 차례가 된 날 목사이자 교사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예배는 기도와 성경 읽기, 짧은 설교와 개인 간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황, 2012, 71).
우치무라 간조는 직접 쓴 글에서 자신은 교회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일본 문화에 서구 교회 형태를 강요하는 데 반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치무라 간조의 말은 영국인들이 기독교의 한 형식을 발전시키고 독일인들이 또 다른 형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인 역시 선교사들이 가져온 미국적 형식을 그대로 따라야 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정도에 따라 이단으로 정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본 고유의 형식을 발전시키는 일은 정당하며 적절하다는 뜻이었다(황, 2012, 76).
우치무라 간조에 따르면 그가 수년간 가르친 학생 중 그를 가장 잘 이해했던 것은 김교신일 것이다. 그는 1922년 10월24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데마치에서 로마서 강연을 마치고 감사를 표한 사람이 지금까지 4명(700 명 중) 있었다. 그중 어떤 조선 사람의 글이 가장 강하게 내 마음에 와닿았다.
‘우치무라 선생님, 60여 회에 걸친 선생님의 로마서 강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싫증 없이 즐거움으로 참석하여 배울 수 있었던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작년 1월부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할 수가 있었는데, 오늘 마지막 강의로써 이 위대한 책에 대한 선생님의 개관을 듣는 행운을 누렸다는 사실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들은 그 부모가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고자 고생하는 데 대해 감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먹는 상에서 떨어질 떡 부스러기를 소망하던 개가 그들이 먹는 것과 같이 떡을 받았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 15:26-28)?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은 극동의 끝에서 거룩한 십자가 깃발을 높고도 굳건히 붙잡고,민족의 원수라 부르는 이들의 학대와 참기 힘든 비방을 견뎌 낸 분이십니다.’ [주. 당시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압박과 비방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나라의 원수로 여겨졌다.]
이 조선 사람의 편지를 받고서 나는 감사의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장차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이가 바로 이 조선 사람으로 밝혀질지도 모를 일이다(김 인용, 2012,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