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교신 특집】 제2부. 기독교의 두 가지 선택: 토착인가, 이단인가?
2부. 기독교의 두 가지 선택: 토착인가, 이단인가?
【김교신은 누구인가?】
김교신 선생은 오늘날 한국과 전 세계가 귀 기울여야 할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 한 사람으로, 이 글은 폴리현숙 박사(한국 순교자의 소리 회장)가 그에 관해 쓴 특집 소론(小論)이다.

시간의 흐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김교신이 살았고 글을 쓰던 그 시대, 한국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고, 아직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 교회는 자기 정체성과 실천을 놓고 고심 중이었다.
이후 기적 같은 성장기를 거치면서, 교회는 성장을 위한 올바른 선택과 방식을 찾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기적의 성장이 지나가고 심지어 쇠퇴를 겪기 시작한 오늘날(이, 2011, 100), 그 당시 우리가 선택했던 것들 중 몇 가지를 재검토하고 개혁이 필요한 부분이 없는지 알아본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김교신의 사상과 직접 관련해 재검토되어야 할 분야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 토착화의 문제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에서 기독교 신앙은 달리 보여져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느 정도이며 어떤 문화적 적용이 유익하고 필요한지 혹은 어떤 적용이 해롭고 이단적이기까지 한지 우리는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선임연구원 김윤성(2004, 2012)은 한국 교회 역사 안에서 기독교 토착화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신학보다는 실천에 연관된 전형성을 띄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가 기독교 토착화를 삶이나 선행에 관련된 긍정적 측면보다는 일종의 퇴보로 여겼다고 서술한다.
연세대학교 서정민(2005, 451)에 따르면, 이는 한국 교회사에서 정통성이란 기본적으로 서구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부터 서구의 기독교적 실천을 벗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당연히 이단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선교학자들은 토착화를 무조건 퇴보의 징후나 이단적 행동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 새로운 문화에서 복음이 제대로 이해되는 데 있어 토착화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정통성이 토착화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토착 사상과 실천을 발달시키도록 안내해주고 교회가 역사와 시대를 넘어 중요하다고 동의해 왔던 특정 범위 내에서 그것을 지켜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국 기독교 신학자 앤드루 F. 월스(Andrew F. Walls)는 성서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선교 발달을 살펴보면서, 기독교를 토착화하는 데 실패했다면 그것은 개종자가 아닌 교회 회원수만 늘리는 결과이므로 그 자체가 이단이라고 결론지었다.
이후 교회는 수많은 이단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중 최초의 이단이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유대교화(Judaizing)’ 경향의 본질은 우리가 지닌 종교적 문화와 토라와 할례를 도입하라는 강요였다.
신약성경에 설명된 대로라면 기독교 개종은 오래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적인 교회는 그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전형적인 교회 회원제로의 회귀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교회 회원제라는 문제에 관해 유일하게 기록된 주님의 발언, 즉 각고의 노력으로 얻은 교인 한 사람이 쉽사리 지옥 자식이 된다는 말씀(마 23:15)을 기억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개종은 이미 있던 것에 새로운 무언가를 첨가하는 일, 즉 기존에 존재하던 것을 보충하거나 갈고 닦기 위해 일련의 새로운 신념과 가치를 더하는 일도 아니다. 개종은 훨씬 더 급진적인 어떤 것을 요구한다.
개종이란 내용보다는 방향에 관한 것이다. 개종은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유산을 비롯한 전인격(全人格)을 그리스도께 향하도록 하는 변화, 즉 그분께 전인격을 열어드린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의 방향을 돌리는 일인 것이다(Walls, 2004, 5).
이어 월스는 놀랍게도 복음주의적 기독교인(한국에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처럼)이 이와 같은 이단성을 범할 위험성이 가장 높다는 점을 암시한다. 믿음을 얻게 되는 개인적 경험이 기독교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선교사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서, 심지어 이전까지 기독교적 신앙 고백이 전혀 없었던 사회에서 유사 형태의 체험을 보게 되리라 기대’했었다(Walls, 2004, 2)..
다른 말로 하자면, 미국인 선교사들은 미국식 개종을 찾는다는 것이다. 어떤 개종이 ‘비(非)미국식(un-American)’으로 보인다면, 그들은 이것이 진짜 기독교가 아니거나 심지어 이단일 수 있다고도 여긴다. 월스는 이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상황, 즉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실을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수용하기 힘들어 했던 것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월스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개종한 헬라식 생활 방식을 정립하려다 엉망진창이 된 고린도 교인들보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그러한 생활 방식을 거부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의 말투가 더 혹독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월스, 2004, 6)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한국 사회의 비기독교적 사고 및 행동 방식이 제대로 도전 받고 변화될 수 있는 것이므로, 어쩌면 한국 교회와 그들을 도왔던 초대 미국인 선교사들은 기꺼이 ‘엉망진창이 되어가면서’(혹은 그것을 수용하면서) 더 위대한 토착화를 향해 노력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 변화들이 훨씬 더 깊이 있게, 더 널리, 더 오래 지속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 실정으로 보아 한국 교회는 스스로 한국 문화에 충분히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고 꽤나 만족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의 기준이 너무 낮은 것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저명한 선교학자 라민 사네(Lamin Sanneh)는 “[초대 기독교 개종자들의 책임은] 다른 누군가의 민족적 관습을 그들의 땅에 뿌리내리게 하기보다는 기독교를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한다(Lamin Sanneh, 2007, 9).
한국에 미국식 기독교를 가져다 준 것은 분명 한국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어쩌면 한국을 더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데 쏟아부을 수 있었을 귀한 역량과 관심을 한국을 보다 더 미국화하는 데 써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월스는 이 같은 상황이 선교사들이 개종이라는 골치 아픈 길 대신 교회 회원제라는 보다 더 안전한 길을 택할 때마다 흔히 발생되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교회 회원제의 일반적 효과라면 거의 확실히 새로운 신자의 역량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왔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이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들을 양산해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사회와 사고 방식에 미쳤을 그들의 영향력은 미미했을 것이다(월스, 200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