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특집】 제1부. 담대히 옳은 일을 할 자유
질문: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운동(Non-Church Movement)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1. 설립된 교회를 거부했다,
2. 교회와 목사 안수에 속한 모든 권위를 부정했다,
3. 세례를 거부했다,
4. 성찬식을 거부했다
— 미주한인장로회 목사 고시 문제집(2015) 중
미주한인장로회(KPCA)의 목사 고시 문제집 중 교회사(敎會史) 부분 250개 문항에는 위의 ‘단답형’ 질문을 포함해 3개의 김교신 관련 문항이 있다. 어떤 문항도 그를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 사실, 한국 교회사 교과서에서 언급되는 김교신은 보통 다소 비극적인 인물로 소개된다. 한국을 열렬히 사랑했던 훌륭하고 청렴결백한 사람, 한국 기독교에 헌신을 다했으나 결국은 한국 교회를 거부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김교신을 적합하게 묘사한 것인가? 연세대학교 서종민 교수가 ‘한국 민족주의 기독교의 한 형태’(황, 2012, 3)라고 묘사했던 것처럼 그는 무교회주의 운동을 일으킨 아웃사이더로 기억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오늘날 그가 쓴 글들을 역사적인 호기심을 넘어 다른 관점으로 연구할 필요는 없는가?
김교신은 스스로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 무교회주의 운동이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김, 2012, 196). 실제로 그의 글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김 교신과는 한국 교회에 대하여 매우 다른 태도와 매우 다른 목적을 가진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교회사를 공부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김교신이 “장로교회에 다니며 교회 건축헌금을 냈고, 전통 교회가 주관하는 부흥회를 인도해달라는 초청을 받아들였다.”(황, 2012, 105)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놀랄 것이다. 또한 당시에 김교신 스스로가 한국 교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오해받을 것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놀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의 한국 교회(또는 적어도 한국 기독교인)가 자신의 글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1927년에 발행된 성서조선(Bible Korea)의 창간호에서 김교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믿는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김, 2012, 214)
앞으로 8회에 걸친 특집 소론을 통해 김교신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이루고자 했던 바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김교신이 위의 글을 언급한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지금, 이제서야 김교신이 동지를 만날 수 있을 지, 즉 100년을 앞선 그 시대에 김교신이 정립한 실천 사상을 새로이 들어보고 기꺼이 실천할 수 있는 동지를 만날 수 있을지 고려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