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특집】 제8부. 그 어느 때보다 김교신이 더 중요한 이유

【김교신 특집】 제8부. 그 어느 때보다 김교신이 더 중요한 이유

김교신의 시도는 실로 대담했다. 그 시도는 그 나라에 살고 있는 각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변화됨으로 그 나라도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변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쇠퇴하기 시작한(황, 2012, 23 참조) 한국교회를 보면, 그러한 노력이 무모한 것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시도였음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김교신이 살았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러한 노력은 실제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할 수 있다.

일부 초기 조선 교회 지도자들이 선호했던 모델, 즉 “선진문화를 이루기 위한 문화적 도구”로 받아들인 미국식 기독교는 이제 그 시간을 다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이, 2011, 99). 김교신은 좀더 급진적인 방법에 우리를 계속 집중하게 만든다. 조선 기독교의 진정한 토착화 형태를 재발견하려는 새로운 헌신, 즉 성경과 조선 문화를 사실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세상과도 나눌 수 있는 조선 기독교의 진정한 토착화 형태 말이다.

만일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그런 접근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들린다면, 김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국 이루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1927년, 김교신은 월간지 창간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 신자보다는 조선의 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골로 가라, 거기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을 너의 사명으로 삼으라(김, 2012, 214).

만일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이 김교신이 원한 국제적이고 성경적인 혁명의 시작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각 사람을 참된 개종(genuine conversion)과 개인적 변화로 인도하는 가르침보다는 어떤 종교에 속하는지와 교회 성장 전략이 기독교인을 만드는데 더 중요하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김교신의 경우, 그러한 가르침은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항상 이루어졌다. 김교신이 해온 일 자체가 바로 이런 인내심과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전집의 편집자가 언급했듯이, 《성서조선》 독자는 많아야 300명이었고 준회원은 10-20명을 넘지 못했다.

김교신은 단 한 사람과 그의 거실에서 성경공부를 할 때도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성경공부를 이어갔다.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참된 개종은 3년에 한 명, 5년에 한 명이나 두 명, 또는 10년에 3명이나 그 이하로 일어난다”(김, 2012, 178).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러한 전략이 한국 사람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신약성서 기준으로는 전혀 특이하지 않다.

김교신이 유일한 기준으로 삼은 것은 신약성서 뿐이었고, 신약성서를 척도로 조선교회를 평가하고 조선교회가 맺은 열매를 평가했다. 그는 조선교회가 기독교를 “십자가로 가는 길이 아닌 건강 및 물질적 행복을 얻는 길”로 소개하는 것을 슬퍼했다(웰즈, 2001, 168).

그는 마가복음 8:32-38(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필요성을 보지 못하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장면)과 누가복음 12:49-53(예수님께서 그의 말씀이 가족을 분쟁하게 하고 땅에 불을 던질 거라고 경고하시는 장면)을 인용하며, 조선 기독교인들에게 서양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개념과 힘에 대한 세상적인 개념을 버리라고 촉구했다(웰즈, 2001, 168).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처음 이 소론에서 언급한 미주한인장로회(KPCA)의 목사 고시 문제집에 제출된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운동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 질문은 기성교회를 거부하고, 교회의 권위와 안수에 대하여 부정하고, 세례와 성만찬을 거부한 것이 문제들이었다고 설명함으로써 자체적으로 이미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을 주고 있다(미주 한인교회 목사안수 고시, 2015).

국가와 개인의 참된 변화에 대한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을 무시하면서도 위에 언급한 문제들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한국 교회가 실제로는 문제라고 목사 고시 시험관들에게 답변하는 김교신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국 교회가 쇠퇴하기 시작한 이 시대에, 어쩌면 김교신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제7부.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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