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투르크메니스탄에 송출되는 복음 방송

제1부 – 투르크메니스탄에 송출되는 복음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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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 목사

실라Silas는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urkmen Soviet Socialist Republic’에서 성장하는 동안 정체성 고민에 빠졌다. 실라의 가족은 집에서는 무슬림 문화를 소중히 지켰으나, 공식적으로는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소비에트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실라는 ‘알라Allah (이슬람교에서 유일신으로 믿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산주의 학교 선생님들에게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함께 이슬람 방식으로 기도하고 코란Quran을 읽었다.

 

십대 시절, 실라는 알라의 존재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많은 의문을 품었다. 실라는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알라가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궁금했다. 실라는 자기가 마음으로는 무슬림이지만 머리로는 무신론자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제 영혼을 만족시켜줄 정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신론이 가장 타당하게 생각됐고, 그래서 더 확고한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실라는 말했다.

 

1990년대 초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실라는 몇 년 후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거의 같은 시기인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투르크메니스탄은 독립 국가가 되었다.

 

“많은 것들이 불확실했어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었고, 마치 새로운 나라에서 인생의 모든 면들을 새로 시작하는 것 같았죠. 소련 붕괴 후에 우리 삶이 어떤 식으로 계속될지 불안했습니다”라고 실라는 말했다.

 

그리고 곧, 실라가 이슬람교의 가르침을 따라 알라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들과 그의 무신론적 세계관도 붕괴되었다.

거룩한 불

1994년 어느 날, 실라는 처남으로부터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 실라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항상 러시아의 압제자들과 연관지어 생각했고,  TV나 책으로만 기독교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있었지만, 처남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자 주의 깊게 경청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처남에게 전해 들었을 때 저는 그분께 완전히 빠져들어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라고 실라는 말했다.

 

실라의 처남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영화로, 전도에 사용되는  <예수 영화Jesus film> 복사본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실라는 아내 옐레나와 함께 그 영화를 보았다. 엘레나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비디오 플레이어를 갖고 있었다.

 

실라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영화를 보기 시작하는 순간, 예수님이 제 모국어인 투르크멘어로 말씀하시는 것이 들리면서 복음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은  머리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 제 영혼과 마음을 울렸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그 영화를 보는 동안,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고, 마침내 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 인생을 그분께 맡겼습니다.”

 

기쁨에 넘친 실라는 집으로 달려가 75세의 노모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런 다음 실라는 마을로 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신약과 시편이 들어 있는 작은 러시아어 포켓 성경을 받은 후, 실라는 친구와 이웃과 가족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러시아어로 들으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대부분은 계속 들었고, 몇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기도 했다. 실라는 이 기독교인들이 투르크메니스탄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교회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교제하고, 어떻게 성경을 읽고 이해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때때로 다른 신자들을 만나 함께 기도하기 위해 노력했고, 모든 것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우리 모두가 동시에 배우고 있었습니다”라고 실라는 말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양육받지 않았고, 전도하라는 요구도 받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구원의 기쁨과 체험을 주셨기에 자연스럽게 밖에 나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이었습니다”라고 실라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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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메니스탄 사역 초기, 실라 목사와 아내의 모습. 앞줄에 앉아 있는 남성이 실라목사이고,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옆에 서 있는 여성이 그의 아내이다

그해 말, 실라는 국제법을 공부하기 위해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슈가바트Ashgabat로 이사했다. 옐레나는 당분간, 남편에게서 수백 킬로 떨어진 마을에서 어린 두 자녀를 돌보며 지냈다.

 

실라는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떠난 뒤에도, 기독교인 몇 사람이 제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실라는 수도 아슈가바트에 정착한 뒤, 러시아의 한 공인 교회와 연계된 가정교회에 들어갔다. 실라는 세례와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 정부가 불법으로 선언한 투르크멘어 성경도 한 권 얻었다.

 

실라는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가운데는 KGB 요원이나 외무부 직원이나 대통령 경호실 요원 등 공산주의 지도자를 부모로 두고 있는 학급 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건 내 권리야. 난 내 믿음을 전할 권리가 있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실라는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 실라는 아슈가바트에 남았고 옐레나도 두 자녀를 데리고 합류했다. 가족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실라는 ‘무역 및 대외 경제 관계 부처’의 변호사가 되었지만 일이 즐겁지 않았다.

 

약 1년 후, 실라는 목사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는데, 이로 인해 결국 아버지에게 의절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실라 목사는 아슈가바트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여 가정교회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관철시켜 나갔다. “저에게는 주님께 받은 소명이 더 중요했고, 하나님 나라의 일이 우선이었습니다”라고 실라는 말했다.

 

실라 목사에게 한 가지 장애가 된 것은 구소련 시대에 강요된 러시아 문화를 수용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투르크메니스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포들에게 가서 투르크메니스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꿀 필요가 없고, 예수님은 투르크메니스탄 사람을 사랑하며 알고 계신다고 전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목회자로서 맞이하는 첫해에 실라 목사가 개척한 가정교회는 30명 규모에서 100명 이상의 규모로 성장했다. 모든 가정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왔다. “그들 모두가 …… 소망과 변화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마약 중독자와 알코올 중독자였고 매우 폭력적이었는데, 남편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자, 많은 아내들이 남편을 따라 주님께 나왔습니다”라고 실라 목사는 말했다.

 

실라 목사는 본인이 <예수 영화>를 보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투르크메니스탄 국민에게 그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비디오 플레이어를 소유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창의력을 발휘해야 했다. 실라 목사는 <예수 영화>의 오디오 부분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다음, 사람들이 자동차 안에서 은밀하게 들을 수 있도록 배포했다.

 

결국 실라 목사가 인내로 복음을 전하고 있고, 그가 섬기는 가정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말이 당국자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실라 목사는 투르크메니스탄 당국자들이 교회의 성장을, 투르크메니스탄에 불안정을 조장할 목적으로 서방 세계가 만들어 낸 정치 운동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우리 교회는 <예수 영화> 오디오 카세트테이프 1만 개를 배포했습니다. 그것이 저와 우리 교회가 그들의 표적이 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카세트테이프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실라 목사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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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 목사와 옐레나 사모

증대되는 압박

어느 날, 당국자들이 실라 목사의 가정교회를 급습하여 카세트테이프 1천개와 수많은 성경을 몰수했다. 실라 목사는 당시 사건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들이 카메라를 들고 와서 우리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당국자들과 이슬람 지도자들, KGB와 경찰이었습니다. 그들은 교인들 이름을 적고 겁을 주면서 ‘이런 데 모이면 안 돼요. 전도는 불법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투르크메니스탄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실라 목사는 법률 지식을 발휘하여 당국자들의 헌법 해석 방법에 도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실라 목사의 주장은 당국자들의 실력 행사 앞에서 무색해졌고, 당국은 기독교인들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점유하고 있는 지위를 위협함으로써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했다. “교회가 설립되어 성장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정부라는 거대한 기계가 교회를 무너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매우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라고 실라 목사는 말했다.

 

경찰은 실라 목사를 체포하고 아슈가바트에서 사는 것을 금지한 후, 고향 마을로 가는 기차에 태웠지만, 실라 목사를 그렇게 쉽게 제거할 수 없었다. “경찰은 종착역까지 저를 호송할 사람을 배치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몇 정거장을 지나 기차에서 뛰어내렸고, 다시 돌아가 교회를 인도했습니다”라고 실라 목사는 말했다.

 

당국은 실라 목사를 다시 체포했다. 사실, 경찰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라 목사를 반복적으로 체포했고, 매번 그럴 때마다 실라 목사와 가족을 더욱 거칠게 압박했다.

 

아슈가바트에서 가정교회가 모였을 때 실라 목사를 비롯한 교인들은 정부의 정보원이 교인들 사이에 침투해 있는 것을 종종 발견했다. 한 남성은 KGB가 자신을 구타한 뒤에 머리에 총을 겨누고 그 교회를 염탐할 것을 명령했다고 실라 목사에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실라 목사는 말했다.

 

실라 목사는 주로 아슈가바트에 있는 교회들에 집중했지만, 그의 마을에 있는 가정교회 조직도 500명 이상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자 그곳 당국자들도 기독교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경찰과 KGB가 개입했을 때 우리는 100명 남짓 되는 교인이 비밀스럽게 모이고 있었습니다. 당국의 압박은 효과가 엄청났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했고, 우리 교회에서만 약 40명이 정기적으로 출석하여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중단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두려워했습니다”라고 실라 목사는 말했다.

 

당국의 압박이 점점 증대되었지만, 실라 목사는 아슈가바트에 있는 교회들과 고향 마을에 있는 교회들을 계속 이끌며 격려했다. 그러던 2000년 초, 당국은 실라 목사의 전도를 막기 위해 새로운 차원의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실라 목사를 중상모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슈가바트의 한 신문은 실라 목사가 지하 종교 분파 지도자이며, 외국 정부와 협력하여 조국을 배신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를 쓴 사람을 알아낸 뒤에 직접 대면했습니다. 저를 알지도 못하고 인터뷰도 해보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저에 대해 그런 기사를 썼느냐고 물으니까 ‘제가 쓴 게 아니에요. KGB가 명령한 거예요’라고 대답하더라고요”라고 실라 목사는 말했다.

 

실라 목사는 해당 신문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 위해 변호사를 만났지만, 변호사는 공산주의 스타일의 정부와 연결된 사람에게 맞서 싸우지 말라고 경고했다. 변호사는 “살고 싶으세요? 사모님과 자녀 분들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 그래서 가족들을 잃고 싶으세요?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에요. 조심하세요. 그들에게 맞서려고 하지 마세요”라고 비난하듯 경고했다.

 

거의 10년 전, 투르크메니스탄이 독립한 때부터 실라 목사는 자신의 나라가 더 이상은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라고 확신했고, 그 변호사가 경고한 것 같은 공격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실라 목사가 투르크메니스탄 당국을 과소 평가했다는 사실이 곧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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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 목사는 지금도 양을 키우며,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살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다음 이야기는 순교자의 소리 6월 소식지에 담겨있습니다. 이 링크를 클릭하셔서 지금 바로 읽어보세요.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