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지밍(Wang Zhiming)은 중국 윈난성(Yunnan Province) 북부 우딩 현(Wuding County)에 있는 그의 집 근처에 초기 선교사들이 도착하고 정확히 1년이 지난 뒤에 출생했다. 따라서 왕 지밍의 기독교 신앙은 그 선교사들의 노력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왕 지밍은 3천명 가량의 성도를 돌보는 목회자가 되어, 중국에서 폭력이 가장 난무했던 시기인 문화대혁명(1966-1976) 동안 성도들을 돌보았다.
1966년, 마오쩌둥(Mao Zedong)은 대약진운동(Great Leap Forward)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대약진운동은 서양과 더 잘 경쟁할 목적으로 중국 경제를 현대화하려는 운동이었다. 더욱이 당시 중국은 도시 전문직 종사자와 시골 농민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가 너무 벌어졌는데, 이는 사회 계급을 철폐하려는 공산주의 이념에 직접적으로 어긋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입지를 튼튼하게 다지고, 국가의 혁명 정신을 쇄신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그러한 상황에서 문화대혁명을 감행한 것이었다.
열성적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은 사회의 ‘4 구(four old 四舊)’ , 즉 낡은 풍속과 낡은 관습과 낡은 문화와 낡은 사상을 공격했다. 마오쩌둥은 문화 개혁이란 명분으로 학생 운동가들을 징집하여 홍위병(Red Guard)이라 칭한 다음, 이들을 사회에 풀어 놓아 ‘4구’와 비슷한 것은 모두 척결하게 했다. 홍위병은 정부 관리와 지식인, 아니 ‘부르주아’ 습성을 지녔다고 의심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체포하여 협동농장으로 보내 농민과 함께 일하게 했다. 또한 홍위병은 문화 유물이든 예술 작품이든, 공산주의 이전의 중국과 관련된 것 일체를 파괴했다. 또한 기독교가 서양 선교사들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홍위병은 왕 지밍 같은 기독교인을 특별히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무신론 사상의 명분에 왕 지밍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부는 왕 지밍을 공산주의 원칙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었고, 심지어 마오쩌둥과의 만남을 성사시키려고 그를 베이징으로 보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왕 지밍을 재교육하고 공산당 입당을 설득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왕 지밍은 고향 우딩현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겠다는 결의를 더 다지고 우딩 현(Wuding County)으로 돌아갔다.